프로메테우스의 인간 창조기

제우스의손 2023-11-04 오후 2:11:13

프로메테우스는 신과 인간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독특한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한 마리의 소를 죽여 두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이는 두 개의 제물로 구성된 복잡한 퍼즐의 시작이었습니다. 한 부분에는 고기를 숨기고 그 위에 가죽으로 덮어 그것이 고기임을 숨겼습니다. 반대쪽에는 뼈를 놓고 그 위에 기름을 붓는 방식으로 뼈가 더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조작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제우스는 어떤 부분을 인간이 신에게 제물로 바칠지 결정하는 권한을 얻었습니다. 제우스는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기름에 덮인 뼈 부분을 선택하였고, 이 결과로 인간들은 신들에게 제물로 뼈를 바치게 되어, 고기를 자신들이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인간에게 불을 주었고, 인간이 신들을 섬기는 방법을 정하게 함으로써 인간에게 이익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제우스의 불만을 샀고, 이로 인해 프로메테우스는 결국 제우스의 벌을 받게 됐습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주는 행위는, 그저 물리적인 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이성과 지혜, 즉 '빛'을 주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는 인간이 이성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을 주도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들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오만함을 나타내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이 불을 통해 이성과 지혜를 얻었지만, 그 대가로 신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이로 인해 다양한 시련과 고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기분이나 운명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이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을 자신들의 행동과 감정을 지배하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들에게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안정감을 주는 행위였고, 이는 일상 생활에서 생기는 불안함을 해소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의 의지를 받아들이고, 그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인생의 불안함을 해소하는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의 행동은 이러한 통념에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행동은 인간이 신의 의지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지 않음을 강력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위해 제우스를 속이고, 인간에게 불을 주어 신과 인간 사이의 균형을 직접적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는 인간에게 이성과 지혜를 주었고, 이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습니다. 이는 인간이 신의 의지에 완전히 의존하지 않아도 됨을 보여주는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제우스의 불만을 샀고, 프로메테우스는 결국 제우스의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리스 신화에서 신과 인간, 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인간은 이성과 지혜를 통해 자신의 삶을 주도할 수 있지만, 그러한 능력은 신의 분노를 사올 수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결국, 그리스 신화는 인간의 존재와 신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의 욕망과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합니다. 이는 그리스 신화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며, 우리가 오늘날에도 그리스 신화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판도라를 선물로 보내는데요. 이때 에피메테우스는 이미 프로메테우스로부터 "제우스로부터 온 선물은 절대로 받아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경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판도라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그녀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자를 손에 들고 인간들 사이로 들어오게 되는데, 이 상자 속에는 모든 악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처음으로 악을 경험하게 된 순간이자,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복수를 시작한 첫 번째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제우스가 선물한 호기심 때문에, 판도라는 상자를 열게 되고, 그 결과로 세상은 모든 종류의 고통과 재앙이 넘쳐나게 됩니다. 이는 인간들에게 처음으로 고난을 가르치는 순간이며, 이것이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제우스의 첫 번째 복수였습니다. 다음으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카프카스산에 묶어두고, 매일 독수리가 그의 간을 찢어먹게 합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불멸의 신으로서 매일 밤마다 간이 다시 자라나게 됩니다. 이것은 프로메테우스가 겪는 끝없는 고통으로서, 제우스의 두 번째 복수였습니다. 이렇게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와 인간에게 복수를 하면서, 그 과정에서 그는 인간의 존재와 그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얻게 됩니다. 이는 그리스 신화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주제 중 하나로, 신들이 인간의 삶과 고통을 이해하게 되고, 그로 인해 인간들에게 더 나은 존재가 되려는 노력을 보여줍니다. 제우스는 상자에 각종 해로운 것들을 넣어 그것을 판도라와 함께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냅니다. 그러나 에피메테우스는 이미 프로메테우스로부터 제우스가 보낸 선물을 받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판도라의 매력에 이끌려 형의 경고를 잊고 결국 그녀와 결혼하게 됩니다. 잘 알려진 대로, 결혼 생활 도중 판도라는 호기심에 이끌려 상자를 엽니다. 그 순간, 상자 안에서 질병, 고통, 슬픔, 원한 등 인간이 살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악이 튀어나옵니다. 놀란 판도라는 급히 상자 뚜껑을 닫지만, 그 안에는 한 가지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면서도 희망에 의지해 생활을 이어가게 됩니다. 이 희망이 진정한 희망인지, 아니면 다른 종류의 재앙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고통을 지켜보는 프로메테우스의 마음은 찢어집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아직 제우스의 복수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요. 제우스는 강한 쇠사슬로 프로메테우스를 카프카스산에 묶어두고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개는 형벌을 내립니다. 불멸의 신인 프로메테우스는 매일 간이 재생되어 이 고통이 반복됩니다. 그런데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에게 이처럼 잔인한 형벌을 내린 이유는 단순히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제우스의 존립 문제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언젠가 제우스도 그의 할아버지 우라노스와 아버지 크로노스처럼 자신의 자식에게 멸망의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그 자식을 낳을 여자가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운명을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며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사실 프로메테우스는 동생이나 자식들에게 앞으로의 밝지 않은 운명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은 그의 저항과 제우스의 독재에 대한 대립 구조를 보여 주는데, 그 이야기는 그리스 비극 작가 아이스퀼로스의 작품 '망쳐진 프로메테우스'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괴로움을 견디며 지낸 긴 세월 끝에 프로메테우스는 어떤 이유로 인해 해방되게 되는데, 이 순간은 그리스 신화 전반부의 마침표이자 후반부의 시작을 알리는 커다란 전환점이 됩니다. 제우스는 자신이 만든 판도라의 상자로 인해 인간들의 삶이 힘들어진 것에 불만을 품고, 그들이 제사를 소홀히 한다며 분노합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 세상에 내려와 리카온에게 인간을 쓸어버리기로 결심합니다. 그의 방법은 홍수를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포세이돈과 함께 홍수를 일으켜 세상을 뒤덮었지만, 높이 솟은 파르나소스 산의 꼭대기만은 잠기지 않았습니다. 그 곳에는 프로메테우스의 아들 데우칼리온과 에피메테우스와 판도라의 딸 피라, 즉 사촌지간이자 부부인 두 사람이 생존했습니다. 이들이 살아남은 것 역시 프로메테우스가 미래를 예지하고 미리 준비시킨 결과였습니다. 이 둘을 보고 제우스가 분노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평소 신들을 성실하게 섬겼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제우스는 두 사람을 위해 지구상에서 생명이 모두 없어진 것을 확인한 후 홍수를 그치게 합니다. 데우칼리온과 피라는 파르나소스 산에서 내려와 눈앞에 보이는 테미스의 신전에서 기도를 드립니다. 그들은 테미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면서도, 세상이 진흙탕이 되어 사람이 없어 외롭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고 호소합니다. 그러자 테미스의 음성이 들려오며, "옷을 벗어 베일을 쓰고 어머니의 뼈를 등에 지고 이곳을 떠나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두 사람은 놀라며 이해할 수 없는 요구에 당황합니다. 데우칼리온과 피라는 테미스의 말의 은유적인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어머니'라는 말은 대지를 가리키며, '어머니의 뼈'는 돌맹이를 의미함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둘은 신의 말대로 돌맹이를 뒤로 던지며 신전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돌맹이들이 하나하나 인간의 형상으로 변해갑니다. 그렇게 인류가 다시 탄생하게 되고, 이후 인간들은 신을 향한 존경과 경의를 소홀히 하지 않게 됩니다. 이는 신을 중요시하는 그리스인들의 인식이 반영된 결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홍수에 의한 세상의 멸망과 재생은 성경을 비롯해 수메르 신화, 중국 신화 등 여러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이는 대형 홍수나 지진 같은 자연재해가 인류의 삶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경험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또한 이는 인류의 공통적인 심리를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즉, 혼란스러운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 즉 인류의 멸망 버튼을 누르고 싶은 욕망, 그리고 죄의식에 기반한 자기 처벌의 욕구가 담겨 있는 것일 겁니다. 특히 재앙이 불이나 지진이 아니라 홍수로 일어나야 하는 이유는 원초적인 물 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은 정화의 바람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의 인간 창조기

제우스의손 (2023-11-04 오후 2:11:13)

프로메테우스는 신과 인간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독특한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한 마리의 소를 죽여 두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이는 두 개의 제물로 구성된 복잡한 퍼즐의 시작이었습니다. 한 부분에는 고기를 숨기고 그 위에 가죽으로 덮어 그것이 고기임을 숨겼습니다. 반대쪽에는 뼈를 놓고 그 위에 기름을 붓는 방식으로 뼈가 더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조작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제우스는 어떤 부분을 인간이 신에게 제물로 바칠지 결정하는 권한을 얻었습니다. 제우스는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기름에 덮인 뼈 부분을 선택하였고, 이 결과로 인간들은 신들에게 제물로 뼈를 바치게 되어, 고기를 자신들이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인간에게 불을 주었고, 인간이 신들을 섬기는 방법을 정하게 함으로써 인간에게 이익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제우스의 불만을 샀고, 이로 인해 프로메테우스는 결국 제우스의 벌을 받게 됐습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주는 행위는, 그저 물리적인 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이성과 지혜, 즉 '빛'을 주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는 인간이 이성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을 주도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들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오만함을 나타내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이 불을 통해 이성과 지혜를 얻었지만, 그 대가로 신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이로 인해 다양한 시련과 고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기분이나 운명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이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을 자신들의 행동과 감정을 지배하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들에게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안정감을 주는 행위였고, 이는 일상 생활에서 생기는 불안함을 해소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의 의지를 받아들이고, 그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인생의 불안함을 해소하는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의 행동은 이러한 통념에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행동은 인간이 신의 의지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지 않음을 강력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위해 제우스를 속이고, 인간에게 불을 주어 신과 인간 사이의 균형을 직접적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는 인간에게 이성과 지혜를 주었고, 이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습니다. 이는 인간이 신의 의지에 완전히 의존하지 않아도 됨을 보여주는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제우스의 불만을 샀고, 프로메테우스는 결국 제우스의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리스 신화에서 신과 인간, 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인간은 이성과 지혜를 통해 자신의 삶을 주도할 수 있지만, 그러한 능력은 신의 분노를 사올 수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결국, 그리스 신화는 인간의 존재와 신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의 욕망과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합니다. 이는 그리스 신화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며, 우리가 오늘날에도 그리스 신화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판도라를 선물로 보내는데요. 이때 에피메테우스는 이미 프로메테우스로부터 "제우스로부터 온 선물은 절대로 받아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경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판도라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그녀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자를 손에 들고 인간들 사이로 들어오게 되는데, 이 상자 속에는 모든 악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처음으로 악을 경험하게 된 순간이자,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복수를 시작한 첫 번째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제우스가 선물한 호기심 때문에, 판도라는 상자를 열게 되고, 그 결과로 세상은 모든 종류의 고통과 재앙이 넘쳐나게 됩니다. 이는 인간들에게 처음으로 고난을 가르치는 순간이며, 이것이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제우스의 첫 번째 복수였습니다. 다음으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카프카스산에 묶어두고, 매일 독수리가 그의 간을 찢어먹게 합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불멸의 신으로서 매일 밤마다 간이 다시 자라나게 됩니다. 이것은 프로메테우스가 겪는 끝없는 고통으로서, 제우스의 두 번째 복수였습니다. 이렇게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와 인간에게 복수를 하면서, 그 과정에서 그는 인간의 존재와 그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얻게 됩니다. 이는 그리스 신화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주제 중 하나로, 신들이 인간의 삶과 고통을 이해하게 되고, 그로 인해 인간들에게 더 나은 존재가 되려는 노력을 보여줍니다. 제우스는 상자에 각종 해로운 것들을 넣어 그것을 판도라와 함께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냅니다. 그러나 에피메테우스는 이미 프로메테우스로부터 제우스가 보낸 선물을 받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판도라의 매력에 이끌려 형의 경고를 잊고 결국 그녀와 결혼하게 됩니다. 잘 알려진 대로, 결혼 생활 도중 판도라는 호기심에 이끌려 상자를 엽니다. 그 순간, 상자 안에서 질병, 고통, 슬픔, 원한 등 인간이 살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악이 튀어나옵니다. 놀란 판도라는 급히 상자 뚜껑을 닫지만, 그 안에는 한 가지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면서도 희망에 의지해 생활을 이어가게 됩니다. 이 희망이 진정한 희망인지, 아니면 다른 종류의 재앙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고통을 지켜보는 프로메테우스의 마음은 찢어집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아직 제우스의 복수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요. 제우스는 강한 쇠사슬로 프로메테우스를 카프카스산에 묶어두고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개는 형벌을 내립니다. 불멸의 신인 프로메테우스는 매일 간이 재생되어 이 고통이 반복됩니다. 그런데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에게 이처럼 잔인한 형벌을 내린 이유는 단순히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제우스의 존립 문제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언젠가 제우스도 그의 할아버지 우라노스와 아버지 크로노스처럼 자신의 자식에게 멸망의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그 자식을 낳을 여자가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운명을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며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사실 프로메테우스는 동생이나 자식들에게 앞으로의 밝지 않은 운명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은 그의 저항과 제우스의 독재에 대한 대립 구조를 보여 주는데, 그 이야기는 그리스 비극 작가 아이스퀼로스의 작품 '망쳐진 프로메테우스'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괴로움을 견디며 지낸 긴 세월 끝에 프로메테우스는 어떤 이유로 인해 해방되게 되는데, 이 순간은 그리스 신화 전반부의 마침표이자 후반부의 시작을 알리는 커다란 전환점이 됩니다. 제우스는 자신이 만든 판도라의 상자로 인해 인간들의 삶이 힘들어진 것에 불만을 품고, 그들이 제사를 소홀히 한다며 분노합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 세상에 내려와 리카온에게 인간을 쓸어버리기로 결심합니다. 그의 방법은 홍수를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포세이돈과 함께 홍수를 일으켜 세상을 뒤덮었지만, 높이 솟은 파르나소스 산의 꼭대기만은 잠기지 않았습니다. 그 곳에는 프로메테우스의 아들 데우칼리온과 에피메테우스와 판도라의 딸 피라, 즉 사촌지간이자 부부인 두 사람이 생존했습니다. 이들이 살아남은 것 역시 프로메테우스가 미래를 예지하고 미리 준비시킨 결과였습니다. 이 둘을 보고 제우스가 분노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평소 신들을 성실하게 섬겼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제우스는 두 사람을 위해 지구상에서 생명이 모두 없어진 것을 확인한 후 홍수를 그치게 합니다. 데우칼리온과 피라는 파르나소스 산에서 내려와 눈앞에 보이는 테미스의 신전에서 기도를 드립니다. 그들은 테미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면서도, 세상이 진흙탕이 되어 사람이 없어 외롭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고 호소합니다. 그러자 테미스의 음성이 들려오며, "옷을 벗어 베일을 쓰고 어머니의 뼈를 등에 지고 이곳을 떠나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두 사람은 놀라며 이해할 수 없는 요구에 당황합니다. 데우칼리온과 피라는 테미스의 말의 은유적인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어머니'라는 말은 대지를 가리키며, '어머니의 뼈'는 돌맹이를 의미함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둘은 신의 말대로 돌맹이를 뒤로 던지며 신전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돌맹이들이 하나하나 인간의 형상으로 변해갑니다. 그렇게 인류가 다시 탄생하게 되고, 이후 인간들은 신을 향한 존경과 경의를 소홀히 하지 않게 됩니다. 이는 신을 중요시하는 그리스인들의 인식이 반영된 결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홍수에 의한 세상의 멸망과 재생은 성경을 비롯해 수메르 신화, 중국 신화 등 여러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이는 대형 홍수나 지진 같은 자연재해가 인류의 삶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경험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또한 이는 인류의 공통적인 심리를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즉, 혼란스러운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 즉 인류의 멸망 버튼을 누르고 싶은 욕망, 그리고 죄의식에 기반한 자기 처벌의 욕구가 담겨 있는 것일 겁니다. 특히 재앙이 불이나 지진이 아니라 홍수로 일어나야 하는 이유는 원초적인 물 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은 정화의 바람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우주양자중력이론 (2023-11-04 오전 10:51:09)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 박사와 제임스 허틀 박사는 "허수 시간"이라는 참신한 개념을 도입하여, 빅뱅 이전의 우주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였습니다. 허수는 일반적인 실수와는 별개의 특별한 숫자 형태로서, 이것의 특징은 제곱을 하게 되면 -1이라는 결과값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허수를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시간 개념에 적용하게 되면,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는 다른 차원의 시간, 즉 "허수 시간"을 구성하게 됩니다. 이 허수 시간을 활용하면, 물리학적 특이점에서의 시간의 흐름을 수학적으로 모델링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호킹 박사와 허틀 박사가 제시한 이 아이디어는, 빅뱅 이전의 우주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실수 시간이 아닌, 허수 시간을 기반으로 동작하던 우주였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 허수 시간을 따르는 우주에서 빅뱅이 발생하면서,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실수 시간을 가진 형태의 우주로 변화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설명입니다. 허수 시간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빅뱅 이전의 우주, 즉 특이점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까지 실험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이론으로서, 물리학계에서도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는 학설입니다. 우리는 흔히 거리를 계산할 때 아래와 같은 수식을 이용합니다: S=√(xe2+ye2+ze2+(-i*te2)). 이 수식에서 'i'는 허수를 의미합니다. 허수는 실수 범위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수를 표현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입니다. 허수를 도입함으로써, 우리는 시간이 거꾸로 가더라도 공간이 무한하게 휘어지는 상황을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공간과 시간이 무한히 휘어질 때 발생하는 특이점의 엄청난 에너지를 수학적으로 다룰 수 있게 해줍니다. 이런 방식으로 허수를 이용하면, 시간이 거꾸로 가는 상황에 대한 고려를 통해 빅뱅 이전의 우주를 탐색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과학자들이 시간을 역행하는 상황을 모델링하고 이해하는 데 중요한 도구로 작용합니다. 즉, 허수 시간을 도입함으로써, 우리는 우주의 시작에 대해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론은 아직까지 완전히 입증되지 않았습니다. 이 수식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상황을 찾아내는 것은 물리학에서 가장 큰 도전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어려운 문제에 대해 과학자들이 계속해서 도전하고 노력하는 모습은 매우 흥미롭고 감동적입니다. 이런 복잡한 문제에 대해 과학자들이 계속해서 노력하고 연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우주와 그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탐구 정신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탐구 정신은 우리가 알려지지 않은 세계를 탐색하고,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허수 시간을 이용한 이런 연구는 그 중 하나일 뿐입니다. 허틀 모델은 빅뱅 이전의 허수 시간을 고려한 모델로, 이는 빅뱅 우주론과 상당히 다른 접근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빅뱅 우주론은 우주가 빅뱅이라는 엄청난 폭발로부터 시작되어, 그 이후로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팽창해왔다는 관점을 제시합니다. 이에 반해, 스티븐 호킹과 제임스 허틀이 제안한 호킹-허틀 모델은 빅뱅 이전의 허수 시간을 고려하여 우주의 시작을 설명합니다. 이 호킹-허틀 모델에서, 우주는 단순히 시간이 지나며 팽창하는 것이 아니라, 허수 시간에서 실수 시간으로 변환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되었다는 설명을 제시합니다. 이렇게 허수 시간을 도입하면, 우주의 시작을 빅뱅 이전으로 확장하여 보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이는 우리가 우주의 시작에 대해 이해하는 데 중요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즉, 허수 시간이라는 개념을 이용하면, 우리는 빅뱅 이전의 시간을 고려하고, 그 시간에서의 우주를 탐색하며 우주의 시작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델은 아직까지 완전히 입증되지 않았으며, 이론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상황을 찾아내는 것은 현대 물리학에서 가장 큰 도전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 과학자들이 끊임없이 도전하고 노력하는 모습은 매우 흥미롭고 감동적입니다. 과학자들이 이런 복잡한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연구하는 이유는 우리가 우주와 그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탐구 정신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탐구 정신은 우리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세계를 탐색하고,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허수 시간을 도입하는 이런 연구는 그 탐구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허틀 모델은 빅뱅 이전의 허수 시간 동안 우주가 점진적으로 성장하다가 어느 순간 실수 시간으로 바뀌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이 모델에 따르면, 우주는 특이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허수 시간 동안 충분히 성장하며 확장된 후 실수 시간으로 전환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허수 시간을 도입함으로써, 특이점에서 발생하는 물리학적 문제를 피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허틀 모델은 특이점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무경계 우주론에는 한 가지 중대한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허수 시간에서 실수 시간으로 어떻게 전환되는지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현재로서는 허수 시간에서 실수 시간으로의 전환 과정을 완벽하게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나 모델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무경계 우주론의 한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현재 가진 물리학 이론으로는 빅뱅, 즉 특이점을 수학적으로 다루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는 물리학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빅뱅이 일어난 직후인 10e-43초 이후의 시간부터를 다룰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수 시간을 도입하여 이 문제를 계산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우주가 생길 확률을 양자역학적인 확률로 계산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허수 시간을 도입한 우주론이 바로 무경계 우주론입니다. 무경계 우주론에 따르면, 우주가 시작하면서 공간과 시간이 동시에 생성되었으므로, 빅뱅 이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주는 허수 시간 동안 성장한 후 실수 시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무경계 우주론의 핵심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 무경계 우주론에도 한 가지 큰 약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주가 허수 시간에서 실수 시간으로 바뀌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현재의 물리학에서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중요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이 문제는 물리학자들에게 큰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가짜뉴스에서 빠져 나오기 힘든 이유는?

마음의스승 (2023-11-04 오전 12:25:21)

세상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이야기와 소설을 통해 복잡한 현실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에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한 이야기들은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현실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도구였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의 사람들은 신화적인 존재인 제우스의 불륜 이야기를 믿었으며, 이것은 그들의 현실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이 불, 물, 풍, 흙의 네 가지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신화나 이론들은 단순한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현실 그 자체였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뇌가 현실을 투명하게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현실을 해석하고 재구성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원리는 현대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몇 년 전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던 '드레스 색깔 논란'을 생각해보면, 같은 사진의 드레스를 보고 있는 사람들이 각자 다른 색상을 보았습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주변 세상을 객관적으로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뇌가 현실을 재해석하고 만들어내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또한, 나무의 년테를 보면 그 나무의 나이와 성장 방향을 쉽게 알 수 있지만, 그 나무가 전기톱으로 깎여져 버린 경우, 그런 정보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은 뇌가 재해석하고 만들어낸 현실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식과 행동을 결정짓는 요소가 됩니다. 이런 이유로, 가짜 정보나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의 생각을 변경하는 것은 까다로운 일입니다. 그들의 뇌는 그런 정보를 현실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며, 그로 인해 그들은 그것을 신뢰하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은 사실 우리 뇌의 복잡한 알고리즘에 의해 결정됩니다. 우리 뇌는 주변의 패턴을 찾아내고, 그것을 의미 있는 정보로 변환하여 우리가 현실을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이 알고리즘은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며, 이것이 우리가 보는 세상을 결정짓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가로줄이 없는 환경에서 성장한 고양이는 가로로 놓인 물건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실험 결과가 있습니다. 이는 그 고양이의 뇌가 가로줄을 인지하는 알고리즘을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뇌는 우리가 보는 세상을 결정하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움벨트'가 됩니다. 이 용어는 독일의 생물학자 야코프 요한 본 윅스킬이 제안한 것으로, 각 개체가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이나 다른 생명체가 보는 세상을 이해한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그들의 세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 뇌는 타인의 생각을 추측할 때조차 자신의 생각을 담당하는 부분이 활성화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자신의 움벨트라는 한정된 감각 세계에 갇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이유로, 가짜 뉴스나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그런 정보는 그들의 움벨트, 즉 그들의 현실이자 세계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뇌는 불확실함과 모호함을 싫어합니다. 이는 그런 것들이 잠재적 위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카니자 트라이앵글'이라는 그림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커다란 흰 삼각형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 뇌가 현실 세계의 정보의 빈틈을 채우려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이 보고 이해하는 세상이 객관적이고 옳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 '수박합'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각자의 움벨트 속에서 살아가며, 그것이 전부라고 믿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뇌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짓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특히, 선한 행동은 우연한 것, 악한 행동은 의도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개인이 극복하기 어려운 재난을 당했을 때 그것이 어떤 가해자의 악의적인 의도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 가해자는 기업이나 정부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논리는 동성애와 같은 사회적 이슈에서도 나타납니다. 실제로 피해자가 없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이와 같은 사회의 약자들이 피해를 입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뇌는 직관적으로 이러한 상황을 해석하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이성만이 인간의 행동을 주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의 뇌과학과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우리의 행동과 판단은 크게 감정에 의해 주도됩니다.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실험에서는 감정 중추가 손상된 사람은 어떤 판단이나 결정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감정이 우리의 판단 체계의 핵심적인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낄까요? 대체로 부정적인 감정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 우리의 세계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는 것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정보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이 때, 이성은 우리의 감정이 내린 판단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는 우리 뇌가 스스로를 제3자처럼 관찰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방식입니다. 내성착각과 변화 맹시는 우리의 뇌가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에 대한 동기를 모두 알지 못하고, 스스로를 제 3자처럼 관찰하면서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변명을 급조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자신의 의견이 바뀌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처음 가지고 있던 견해에 대한 증거를 제시해도 자신은 처음부터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할 만큼 강력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음모론자들은 신화 속 히드라와 같습니다. 음모론자들의 변명을 팩트로 후드려 갈 때마다 이성은 두 개의 변명을 새로 만들어낼 것입니다. 이는 단지 사실을 놓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우주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기 때문에 더욱 격렬하고 질긴 싸움이 됩니다. 음모론자들의 뿌리 깊은 믿음은 결국 틀린 사실과 잘못된 정보 때문이 아니라, 정체성과 감정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현실이 우리의 현실만큼이나 진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나 자체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을 바꾸는 방법은 존재합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과 믿음을 가지는지에 대한 연구부터 시작해, 사람들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딥 캔버싱'이라는 방법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은 팩트 폭행보다는 사람들이 감정과 생각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들의 움벨트로 스스로 들어가 보도록 만드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딥 캔버싱을 이용한 실직 연구에서는 무려 10명 중에 한 명이 생각을 바꾸는 결과를 보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뇌의 본질적인 결함을 이용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세계, 즉 우리의 움벨트는 결국 우리의 감정과 우리의 뇌가 만들어낸 것일 뿐입니다. 딥 캔버싱은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이 여러 연구를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이 방법은 개인의 생각과 태도에 변화를 일으키는데 있어 상당히 유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질적인 연구에서는 딥 캔버싱을 사용할 경우, 10명 중 1명이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매우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러한 수치는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치학자 도널드 그린이 수행한 100편이 넘는 연구에 따르면, 우편물, 홍보물, 전화, TV 광고 등 기존의 정보 제공 방법은 사람들의 생각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한 사회의 4분의 1만이 의견을 바꿔도 사회 전체의 생각이 변화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10명 중 1명이라는 수치가 사회 전체의 의견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만약 여러분이 주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싶다거나, 부모님, 친구, 이웃 등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고 싶다면, 딥 캔버싱에 대해 좀 더 알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들의 생각을 바꾸는 방법"이라는 책을 통해 딥 캔버싱에 대한 자세한 정보와 적용 방법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이론적인 내용뿐 아니라 실제 적용 사례도 다루고 있어, 이를 통해 사람들의 생각과 믿음을 이해하고, 그들의 의견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딥 캔버싱을 통해 개인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은 결국 사회 전체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보리달마, 누구나 쉽고 쉽게 이해하기

아미타불 (2023-11-03 오후 8:50:39)

붓다가 연꽃을 들어올렸을 때, 오직 마하 가섭만이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들 사이에 오간 말은 없었지만, 그들만의 이해를 통해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이는 마하 가섭이 주도한 마가 섭외 사상의 시작이었습니다. 천년이 지나, 그 가르침을 이어받은 28번째 승려는 인도를 떠나 중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달마였으며, 그가 중국에 불교인 선종의 뿌리를 놓게 되었습니다. 달마는 인도의 승려로, 그의 이름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다양한 이야기와 전설로 둘러싸여 있지만, 그의 실존 여부나 생애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서기 5세기 인도에서 태어난 달마는 왕자였으며, 반야달하라는 깨달은 자를 만나 출가를 결심했습니다. 그녀로부터 40년 동안 가르침을 받은 달마는 그 후 스물 여덟번째 조사가 되었습니다. 반야달하가 열반에 들어선 후, 그녀의 말대로 중국으로 가서 법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중국에 도착한 달마는 양나라의 무진을 만났습니다. 당시 중국은 남북조 시대로, 왕조가 계속 바뀌고 전쟁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이미 중국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양나라의 무진은 열렬한 불교 신봉자였습니다. 그는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에 깊이 몰두하였고, 출가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양나라의 무진은 달마에게 다양한 질문을 던졌지만, 그의 대답은 무진이 기대한 대답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공덕에 대해 묻자 "공덕이 없다", 가장 성스러운 진리에 대해 묻자 "모든 것이 텅 비어 있으니 성스러운 것도 없다"고 대답한 달마는 양나라를 떠나 소림사로 갔습니다. 달마는 소림사에서 동굴에 들어가 9년 동안 수행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수행 도중 졸음이 찾아오면 잠이 오지 않도록 눈꺼풀을 뜯어버릴 정도로 수행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 한 사람이 달마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달마의 제자가 되기를 간청했고, 달마는 그의 진심을 확인하기 위해 그에게 많은 시련을 줬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왼팔을 잘라 바치며 달마에게 진심을 보였고, 그 결과 달마는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제자의 이름은 해가였습니다. 해가는 달마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집착을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달마의 가르침을 통해 마음이란 것이 실체가 없는 망상이며, 일어나고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달마는 여러 제자들을 가르치며 각자에게 다른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제자들을 모아 두고 후계자를 정하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각자 자신이 배운 바를 유창하게 말했고,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이해를 보인 사람이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달마는 제자들에게 깊은 진리를 전하려 했으나, 단순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그 본질을 완전히 담아내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 해가는 달마의 가르침 앞에서 침묵을 지키며, 어떠한 말 한마디도 내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가 진리를 말로 설명하는 것이 아닌, 직접 체험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깊은 교훈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해가의 이러한 침묵은 달마와 그의 사상을 완전히 이해하고 공감하는 뜻을 담고 있었고, 이로써 달마의 정식 후계자로서의 자리는 침묵한 해가에게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달마의 깊은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시기하는 이들은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했으며, 반대로 그를 독살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달마는 이들의 죽음에 대한 계획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가르침이 이미 완성되었으며 그의 죽음으로 인해 그 가르침이 더욱 퍼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독이 든 음식을 먹었습니다. 달마의 죽음 후 3년이 지나, 인도에서 중국으로 돌아온 소문이라는 사람이 달마를 만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무덤을 파보니 그의 육체는 없었고, 단지 그의 짚신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달마는 중국에 선종, 즉 마음을 깨닫는 것을 중요시하는 불교의 한 종파를 전파했습니다. 이는 이론적인 지식보다는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을 중요시하는 학파로, 마음의 본질을 깨닫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스승과 제자는 말이나 글로 뜻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는 경험을 얻게 되었습니다. 달마의 가르침은 이심전심, 즉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는 글자나 말에 얽매이지 말고, 본질인 마음에 다가가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참선이라는 수행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참선은 깨달음을 목표로 하여 고요한 집중을 통해 마음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이는 달마가 9년 동안 면벽 수행을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달마는 모든 사람이 본래 부처라고 생각하였고, 이를 깨닫기 위해 수행을 하였습니다. 그는 세속적인 것들에 가려져있는 본래의 부처를 찾아내는 것을 중요시하였습니다. 따라서 외부적인 것들에 집착하거나 그것들을 신봉하는 것은 오히려 부처에서 멀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제자들에 의해 기록되었지만, 그중 어떤 것이 달마의 직접적인 말씀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입사행운이라는 절에는 달마의 가르침이 담겨있다고 여겨집니다. 이 절에 따르면, 달마는 깨달음과 실천, 즉 이익과 행위를 중요시하였습니다. 먼저 깨달음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부처를 알지 못하는 것을 지적하며, 이를 깨닫기 위해선 아무것도 없는 벽을 마주보며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글자나 분별에 매달리지 않는 무위한 상태를 이루게 됩니다. 다음으로 실천 방법인 행위는 4가지 수행 방법을 제시합니다. 첫 번째는 보원행위로, 사람들이 겪는 괴로움은 과거의 업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불교는 윤회, 즉 과거의 업을 가지고 현생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기본 개념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괴로움은 과거의 업을 청산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마의 가르침에는 총 4가지의 수행 방법이 있습니다.첫 번째는 보원행위로, 당면하는 괴로움들은 과거의 원한을 갚는 수행의 일환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괴로움을 겪을 때에도 원망하지 말고 수행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수연행으로,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 생기고 없어지는 것을 인식하며, 즐거움과 괴로움도 인연에 따라 생기고 없어진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묵묵히 수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무소유행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욕심은 괴로움의 씨앗이며, 구함이 없으면 즐거움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됩니다. 모든 현상에는 공허한 이 있으며, 이를 통해 애써 구하려는 마음이 없어질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징법회로,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는 순수하고 청정하며, 모든 현상이 공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를 깨닫는 사람은 아낌없이 베풀며 살아갑니다. 이는 모든 것이 공하므로, 베푸는 것에 대해 대가를 바라거나 애착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달마의 가르침은 중국 선종의 기반이 되었고, 그의 제자들은 이를 계승하여 선종을 널리 퍼뜨렸습니다. 특히 6대 조사 해내는 선종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달마가 선종의 씨앗을 뿌리고 싹을 틔운 것이라면, 해내는 이를 키워 열매를 맺게 한 것입니다. 이로써 선종 사상은 민중에게 가까이 다가갔으며,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는 그들의 수행법은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